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 무흐타디 (문단 편집) === 살리흐 vs 무사 === 살리흐의 잔혹한 복수는 칼리파 무흐타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살리흐 역시도 군대의 급료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무타즈 시절 대신들과 태후인 카비하의 재산을 압수했지만 역부족이었으며 오히려 그의 명성만 추락하였다. 한편, [[하마단]]에 머무르며 타바리스탄의 [[알라비 왕조]] 등 반란군과 싸우던 튀르크 장군 무사 이븐 부가 알 카비르는 살리흐의 실정 소식을 듣고 사마라로 향하였다. 이에 살리흐는 무흐타디로 하여금 전선으로의 복귀를 명하는 편지를 쓰게 하여 무사에게 보냈지만 그는 가볍게 무시하곤 계속 진군하여 869년 12월 11일, 사마라에 입성하였다. (869년 12월 18일) 무사는 무흐타디를 소환하여 태후를 능멸한 죄목으로 살리흐의 처벌을 약속하게 하였다. 한편, 무사에 맞서기 위해 살리흐는 5천 병력을 소집하였으나 막상 싸우려 하자 대부분 도주하고 8백명만이 남았다. 이에 절망한 살리흐는 정면대결 대신 숨어버렸다. 남은 살리흐의 부하들은 시내에서 난동을 피웠고, 이에 무흐타디는 설리흐를 사면할 것을 약속하며 양측 간의 화해를 주선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칼리파가 살리흐와 내통한다고 여긴 무사는 그를 폐위하려 하였는데, 명망이 높던 무흐타디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봉기하여 칼리파가 해를 입는다면 무사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외쳤다. 상황이 복잡해지자 양측 간의 협상이 오갔고, 870년 1월 13일에 무사와 살리흐 모두 예전의 직위로 돌아가며 권력을 분할해 가진다는 잠정 합의가 이루어졌다. 화해의 일환으로 살리흐에 대한 안전 보장이 공표되던 때에, 살리흐의 부하들이 재차 난동을 벌였다. (1월 14일) 무사는 즉시 궁전을 접수하곤 칼리파로 하여금 살리흐와 그 가족 및 장교들은 다음날까지 궁전 앞으로 모이라는, 그리고 그에 불응할시 태형에 처해진 후 투옥된다는 칙령을 내리게 하였다. 이후 무사의 부하들은 살리흐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의심가는 주택들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알 타바리에 의하면 살리흐는 며칠 후에 체포되었고, 궁전으로 압송되던 중 말위야 미나렛 부근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의 수급은 무흐타디에게 보내진 후에 '이것이 자신의 주군을 살해한 자의 최후다' 라는 글귀와 함께 장대에 메달려 사마라 시내에 전시된 후에야 유족들에게 보내져 매장될 수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